시제일까 시상법일까
1.
영어나 한국어를 공부할 때는 시상(aspect)이라는 개념은 잘 몰라도 된다. 몰라도 영어를 공부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 영어의 시제를 공부하다 보면, 시상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의식없이 자연스럽게 그 개념을 체득한다.
그러나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공부할 때는 시상에 대한 개념도 알아두면 좋다. 왜냐하면 각각의 시상에 따라 동사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시상 뿐만 아니라 시간, 법, 태, 인칭, 수에 따라 동사의 형태는 달라진다.
시상은 시간의 변화 속에 존재하는 어떤 일의 양상으로 ⓐ 단순발생, ⓑ 동작이나 상태의 진행이나 반복, 그리고 ⓒ 완료 등을 말한다. 시제(tense)는 시상(미완료, 단순, 완료)과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결합한 것을 말한다.
그리스어 시제는 현재, 미래, 무정(아오리스트), 미완료, 완료, 과거완료, 미래완료 등 7가지가 있고, 라틴어 시제는 현재, 미래, 미완료, 완료, 과거완료, 미래완료 등 6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시제를 시간으로 정의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시제라고 하는 것을 시상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언어학에서는 시상법을 시간(시제, tense), 양상(시상, aspect), 서법(mood 또는 Modality) 등을 융합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 아마도 라틴어 시제에서 가장 주의할 부분이 완료시제와 현재시제로 보인다. 많은 학습서들이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 듯하다. 완료시제는 완료시상과 단순시상 2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문장에서는 단순시상 즉 단순과거로 많이 쓰인다. 현재시제는 미완료시상과 단순시상을 나타내는데, 단순현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하지 않는 듯하다. 만약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요절한다'라는 문장을 라틴어로 쓰면, 현재시제인데 시상은 단순발생이다. 요절한다는 현재 진행이나 현재의 습관(미완료)이 아니다.
2.
이런 용어의 혼란은 시제(tense)와 시간(time)이 라틴어로는 모두 tempus인 것도 한몫을 한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시제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문법적 시간 tempus grammaticum(grammatical tense)’이므로 이 안에 시간과 시상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언어생활에서 시간을 표현할 때 시상과 시간이 결합된 형태로 표현하지 이 둘을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시제 개념이다.
문법적 시간이라는 말은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사건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는 언어의 특성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언어마다 그 종류가 다르다. 둘째는 언어학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시간에 대한 개념 정의라는 뜻이다. 이는 인간의 인식을 반영하는 정의이므로 대개 과거 현재 미래 등 3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의한다.
그런데 시상법이라는 용어는 시제와 양상(시상)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식의 문법적 개념 설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시제 개념과 충돌한다.
시제를 의미하는 ‘문법적 시간(tempus grammaticum)’이 아니라 시제의 한 구성요소로서 문법적(언어학적) ‘시간(tempus)’을 정의할 때 tense(시제)라는 용어 대신 time(시간)을 사용하면 해결될 일이다. 다행히 우리말과 영어는 이 둘을 지칭하는 용어가 별도로 있다.
라틴어인 tempus(뗌뿌스)의 뜻이 시간(time), 시대(age), 시기(period), 시제(tense) 등이라고 해서, 여기에 제시된 4개의 뜻이 모두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특히 시간과 시제는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문법의 차원을 떠나서 단순히 '연속되는 때의 흐름'이다. 어법상(문법상) 표현방식이 어떠하든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일상생활에서 그 '시간'을 경험하며, 이 3가지 시간을 (형태론적이 아니라 의미론적으로) 표현할 줄 안다. 어떤 언어는 2가지 시제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형태론적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과거에 일어난 일을 구별하지 못할 리는 없다.
3.
이 문제는 좀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간혹 전문용어가 일상용어와 그 뜻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전문용어와 학술용어 등을 정의할 때 일상용어와 충돌하지 않았으면 한다. 바람직한 것은 일상 용어가 가지고 있는 뜻의 내포와 외연을 확대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기존에 사용되던 용어를 끌어다 다른 뜻으로 정의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4.
언어학에 대해 전혀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쓴 글이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시제와 시상법에 대해 찾아보니 생각보다 복잡하였다. 우선 tense에 대한 위키의 정의는 “말하는 시점과 관련된 시간의 표현(Tenses generally express time relative to the moment of speaking)”이라고 한다. 앞에서 지적했던 시제 개념(어법상의 시간표현 방식)과 대동소이하다.
시상법은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여러 언어들에 내재한 규칙을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학문적 노력의 과정에서 생성된 용어로 보인다. 언어학에서 사용하는 시상법은 영어로는 TAM(tense–aspect–mood)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시간(시제)이나 양상(시상) 뿐만 아니라 서법(직설법, 가정법 등)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어떤 언어는 이 3가지 영역이 명확하게 구별이 안되어, 해당 언어의 시간 표현방식을 설명하려면 이 통합개념을 이용해야 한다고 한다. 언어에 따라 시간표현에 서법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으며, 중국어처럼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할 때 동사변화를 하지 않는 언어는 시간부사를 사용하여 시간을 표현하기도 한다.
외국어를 학습하는 차원에서는 이런 것을 모른다고 해도 공부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어가 있고 나서 문법이 있는 것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표현 습관을 획득하는 것이지 문법을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학습자에게 문법은 언어를 이해하는 여러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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